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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 | 2001년 1월 19일 금요일, 8시 42분~10시 6분[RNT] | |
발생 위치 | ||
벨포르 금융지구 인근 고층건물 밀집지역 | ||
오보레 공장지대[3] | ||
유형 | 하이재킹을 통한 자살 테러 | |
원인 | 이슬람 극단주의를 표방한 정치·종교적 보복 | |
테러 주동자 | 이브라힘 나쉬디(Ibrahim Nashdi) 노던에어 302/471편 탑승자 포함 총 17명 | |
테러 주동 세력 | 알후라 알자마아 (Al-Hura Al-Jama'a)[4] | |
피해 | 재산 피해 | 항공기 NE302, NE471 완파 세계무역센터 북탑·남탑 완전 붕괴 벨포르 증권거래소 업무 중단, 벨포르 금융지구 GDP 약 218억 달러 감소 항공·물류 산업 손실 추산 약 350억 달러 주요 외국 자산 약 8% 이탈 |
사망 | ||
부상 | 최소 7,000명 ~ 최대 12,000명 | |
분진 피해자 | 3,900명 ~ 60,000여 명[7] | |
여파 | ||
1. 개요 [편집]
1·19 테러(January 19 attacks)는 2001년 1월 19일에 루이나 벨포르에서 발생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 알후라 알자마아(Al-Hura Al-Jama'a)[8]가 자행한 하이재킹 및 자살 테러 사건이다.
알후라 알자마아 소속 테러범들은 민간 항공기 두 대를 납치하여 루이나 벨포르 시 중심부에 위치한 루이나 세계무역센터(BWT)에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테러를 감행하였다. 이로 인해 세계무역센터 북탑과 남탑이 연쇄적으로 붕괴되고, 벨포르 금융지구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이 공격으로 2,908명이 사망하고 7,000명 이상이 부상하였으며, 루이나 역사상 최악의 인명 피해를 초래한 단일 테러 사건으로 기록된다. 수도 벨포르 한복판에 위치한 국가 상징적 시설이 붕괴되었다는 점에서, 루이나뿐 아니라 세계 전역에 심각한 충격을 안겼다.
당시 리처드 엘스워스 대통령은 사건 발생 3일 뒤, 전국 생중계 특별 담화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알후라 알자마아 소속 테러범들은 민간 항공기 두 대를 납치하여 루이나 벨포르 시 중심부에 위치한 루이나 세계무역센터(BWT)에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테러를 감행하였다. 이로 인해 세계무역센터 북탑과 남탑이 연쇄적으로 붕괴되고, 벨포르 금융지구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이 공격으로 2,908명이 사망하고 7,000명 이상이 부상하였으며, 루이나 역사상 최악의 인명 피해를 초래한 단일 테러 사건으로 기록된다. 수도 벨포르 한복판에 위치한 국가 상징적 시설이 붕괴되었다는 점에서, 루이나뿐 아니라 세계 전역에 심각한 충격을 안겼다.
당시 리처드 엘스워스 대통령은 사건 발생 3일 뒤, 전국 생중계 특별 담화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지금 깊은 고통 속에 있지만, 이 고통은 우리의 자유와 헌법, 그리고 시민의 용기를 흔들 수 없습니다. 루이나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테러리즘이 단순한 범죄를 넘어, 국가 전체를 겨냥한 전면적 안보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루이나 사회에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고, 이후 루이나의 외교·정보·군사 정책은 1.19 테러 이후 전면 재편되었다. 불과 9일 만에 야당과 여당이 모두 만장일치로 루이나 국토안보법이 제정되었고, MIA와 국가정보국(NIA)의 권한이 대폭 강화되었다. 항공보안 및 출입국 심사도 전면 개편되었으며, 극단주의 선동 및 종교단체에 대한 정보감시가 국가 차원에서 시행되기 시작했다.
한편 국내 이슬람계 이민자 공동체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혐오범죄도 급증하였고, 급진적 우익 정치세력인 루이나 애국당이 처음으로 대중적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국제적으로는 미합중제국, 플로렌시아와 함께 대테러 공조를 선언하며, 새로운 안보 구도를 구축하는 데 루이나가 핵심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2. 배경 [편집]
1979년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발발 후 이슬람권 각지에서는 '불신자 공산군'과 싸우는 아프간 무슬림들을 돕기 위한 지하드의 일환으로 궐기한 무자헤딘 전사들이 고랜드로 몰려들었다. 냉전으로 사비에트와 대립하던 루이나 정부는 NIA를 통해 그들을 지원했고, 서방 유학을 통해 영어에 능통하던 이브라힘 나쉬디가 그 지도자가 됐다. 그러던 중 1988년, 사비에트가 전쟁에서 손을 떼고 철수를 개시하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사비에트에 대항한다는 방향성을 잃은 지하디스트 세력을 유지하려던 나쉬디는 지하드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고, 그 대상은 바로 기존의 동맹이던 루이나였다. 같은 해 나쉬디는 (후일 그를 계승하는) 아이만 알자와히리 등의 무자헤딘 베테랑들과 함께 고랜드에서 지하드의 선봉이 될 조직으로 (아랍어로 '근본'이란 뜻인) 알후라 알자미아를 창설했다.
1990년,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 전쟁이 발발하자 나쉬디는 무자헤딘 조직의 활용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 지원을 제안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고 대신 루이나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후 루이나군이 사우디에 주둔하게 되자 나쉬디는 사우디 왕가에 타크피르(배교자)라며 지하드를 선포하였다. 또한 '아라비아반도의 비무슬림을 추방할 것[9]'이라는 하디스를 인용하며 1996년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하는 루이나군에 퇴거를 명령하는 파트와를 내렸다.
알후라 알자미아 창설 전부터 이스라엘과 아랍의 세속주의 독재정권들을 지원하는 루이나에 반감을 품어오던 나쉬디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고 전세계 서방권들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에 나서기 시작했다. 1998년 알자미아는 고랜드 루이나 대사관 폭탄 테러와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 테러[10]를 감행하면서 전 세계 이슬람 극단주의에 있어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같은 해 나쉬디는 루이나의 대 이스라엘 정책과 중동 개입을 성토하며 전 세계 무슬림들이 단결해 이슬람 국가들의 공공의 적인 미국과 루이나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중동은 물론 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등 이슬람권 각지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그의 산하에 모여들었다. 충분한 세력을 확보한 나쉬디는 1998년 말부터 시범으로 루이나 본토에 테러를 감행할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1991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의 주동자인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도 있었다.
이후의 인터뷰에서 나쉬디는 1982년 레바논 내전 당시 이스라엘 공군이 루이나에서 구매한 루이나제 무기로 베이루트 도심 고층 건물들을 사정없이 폭격하는 것을 TV로 목도하고는 이를 갈면서 이스라엘의 후원자인 루이나의 마천루 등 루이나 건물들에 대한 공격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나쉬디의 이러한 심리와 실제로 그러한 공격을 감행한 칼리드의 합류는 1·19 테러 계획의 구체화로 이어졌다.
1990년,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 전쟁이 발발하자 나쉬디는 무자헤딘 조직의 활용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 지원을 제안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고 대신 루이나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후 루이나군이 사우디에 주둔하게 되자 나쉬디는 사우디 왕가에 타크피르(배교자)라며 지하드를 선포하였다. 또한 '아라비아반도의 비무슬림을 추방할 것[9]'이라는 하디스를 인용하며 1996년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하는 루이나군에 퇴거를 명령하는 파트와를 내렸다.
알후라 알자미아 창설 전부터 이스라엘과 아랍의 세속주의 독재정권들을 지원하는 루이나에 반감을 품어오던 나쉬디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고 전세계 서방권들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에 나서기 시작했다. 1998년 알자미아는 고랜드 루이나 대사관 폭탄 테러와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 테러[10]를 감행하면서 전 세계 이슬람 극단주의에 있어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같은 해 나쉬디는 루이나의 대 이스라엘 정책과 중동 개입을 성토하며 전 세계 무슬림들이 단결해 이슬람 국가들의 공공의 적인 미국과 루이나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중동은 물론 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등 이슬람권 각지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그의 산하에 모여들었다. 충분한 세력을 확보한 나쉬디는 1998년 말부터 시범으로 루이나 본토에 테러를 감행할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1991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의 주동자인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도 있었다.
이후의 인터뷰에서 나쉬디는 1982년 레바논 내전 당시 이스라엘 공군이 루이나에서 구매한 루이나제 무기로 베이루트 도심 고층 건물들을 사정없이 폭격하는 것을 TV로 목도하고는 이를 갈면서 이스라엘의 후원자인 루이나의 마천루 등 루이나 건물들에 대한 공격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나쉬디의 이러한 심리와 실제로 그러한 공격을 감행한 칼리드의 합류는 1·19 테러 계획의 구체화로 이어졌다.
루이나 군사력의 기반인 경제에 타격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경제가 타격을 입으면 그들은 재건을 해야만 할 것이다.2004년 유고랜드에서 습득된 나쉬디의 녹취록[11]
알자미아의 최종 목표가 된 미국 본토 공격에 있어 나쉬디는 미국의 가장 열렬한 동맹인 루이나에서 먼저 시범적인 형태의 테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루이나 군사력의 기반은 루이나 경제력에 있고, 따라서 루이나 경제의 상징과도 같은 세계무역센터를 테러의 주요 목표로 선정했다. 또한 1월 19일을 실행일로 정한 것은 그가 누차 서방의 중동 개입 시작으로 간주한 제2차 빈 공방전이 절정에 달하던 날이었고, LSEC 총회 개막일이자 나쉬디 자신의 궐석재판 하루 전날이기도 했다. 또한 테러 실행 시간도 이른 아침 시간대라 관광객들이 아닌 출근하는 루이나 시민들을 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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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바로 전날[12]에는 위 사진과 같이 구름이 심하게 껴 있었고 비까지 내렸었다. 만약 테러 날짜가 하루 빨랐다면 시야 확보가 어려워 제대로 충돌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한편 1999년 나쉬디의 참모 모하메드 아테프는 테러 실행 방법으로서 비행기 납치를 결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인원을 모집했다. 그 결과 교육 수준이 높고 서방 유학 또는 거주 경험이 있어 영어가 능숙한 이들이 납치조 약 20여 명으로 꾸려졌다. 당시 탈레반의 초청으로 고랜드를 본거지로 삼던 알자미아는 이들을 초청해 훈련시켰다.[13] 납치조는 2000년 봄부터 차례대로 루이나에 들어갔고, 나쉬디는 유고랜드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친척을 포섭해 그들의 여권을 발급했다. 2000년에 들어간 1차 납치조는 롱비치의 허프만 비행장 등지에서 조종 훈련을 받았고, 2000년 여름에는 2차 납치조가 합류했다. 2000년 11월, 납치조장 격인 모하메드 아타는 스페인에서 알자미아 간부와 접선하여 최종 계획을 브리핑했다. 나쉬디는 이를 승인하고 최대한 빠른 실행을 지시했다.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사실 루이나 정보당국도 어느 정도는 알자미아의 음모를 눈치챘었다. 이미 2000년 전후로 유고랜드 정보당국의 협조로 NIA는 알자미아 조직원들이 루이나 비자를 소지했음을 확인했고, 세계 각지 요원들에게 경고했다. 2000년 7월, NIA는 알자미아 조직원 2인 이상이 루이나에 들어간 것을 확인했고 MIA는 루이나 내 비행학교에서 이상한 조짐을 감지했다. 하지만 두 정보당국의 협조는 거의 없었고, 당연히 이들의 연관성을 찾지 못하고 그저 테러리스트들의 개별 행동으로 치부했다. 심지어 알자미아 조직원에 대한 MIA의 정보공개 요청을 NIA가 거절하는 일도 있었다. 이는 1995년 루이나 법무부가 정보 당국간 극비사항 공유규제를 내렸음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루이나는 2000년 RNS 콜 테러사건 이후에도 알자미아가 단순히 해외에 주둔한 루이나군 공격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여겨 해외 소재 루이나인들의 경계 강화에만 치중했다.
2000년 12월, 마베라 정보 당국은 루이나 측에 알자미아가 루이나 내에서 비행기와 연관된 음모를 진행 중이고, 이는 한 달 안에 집행될 것이라는 중요한 첩보를 전달했다.[14] 그 후 비로소 민간비행학교에 알자미아 조직원이 있다는 MIA의 의혹 제기를 받아들인 NIA는 리처드 엘스워스 루이나 대통령에게 "국내에서 비행기 납치 등의 형태로 공격이 예상된다"고 보고했다.
2000년 12월 29일에는 알자미아 조직원 자카리아스 무사위가 오보레의 비행학교에서 보잉 747기의 조종 훈련을 고집하다가 의심을 받아 체포됐다. 하지만 MIA뿐만 아니라 엘스워스 대통령을 위시로 한 루이나 수뇌부 역시 알자미아를 과소평가하며 납치 후 인질극을 벌일 뿐 감히 루이나 본토를 향한 직접적인 공격을 자행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쉬디가 설정한 테러 개시의 날은 날이 갈수록 묵묵히 다가왔다.
한편 1999년 나쉬디의 참모 모하메드 아테프는 테러 실행 방법으로서 비행기 납치를 결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인원을 모집했다. 그 결과 교육 수준이 높고 서방 유학 또는 거주 경험이 있어 영어가 능숙한 이들이 납치조 약 20여 명으로 꾸려졌다. 당시 탈레반의 초청으로 고랜드를 본거지로 삼던 알자미아는 이들을 초청해 훈련시켰다.[13] 납치조는 2000년 봄부터 차례대로 루이나에 들어갔고, 나쉬디는 유고랜드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친척을 포섭해 그들의 여권을 발급했다. 2000년에 들어간 1차 납치조는 롱비치의 허프만 비행장 등지에서 조종 훈련을 받았고, 2000년 여름에는 2차 납치조가 합류했다. 2000년 11월, 납치조장 격인 모하메드 아타는 스페인에서 알자미아 간부와 접선하여 최종 계획을 브리핑했다. 나쉬디는 이를 승인하고 최대한 빠른 실행을 지시했다.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사실 루이나 정보당국도 어느 정도는 알자미아의 음모를 눈치챘었다. 이미 2000년 전후로 유고랜드 정보당국의 협조로 NIA는 알자미아 조직원들이 루이나 비자를 소지했음을 확인했고, 세계 각지 요원들에게 경고했다. 2000년 7월, NIA는 알자미아 조직원 2인 이상이 루이나에 들어간 것을 확인했고 MIA는 루이나 내 비행학교에서 이상한 조짐을 감지했다. 하지만 두 정보당국의 협조는 거의 없었고, 당연히 이들의 연관성을 찾지 못하고 그저 테러리스트들의 개별 행동으로 치부했다. 심지어 알자미아 조직원에 대한 MIA의 정보공개 요청을 NIA가 거절하는 일도 있었다. 이는 1995년 루이나 법무부가 정보 당국간 극비사항 공유규제를 내렸음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루이나는 2000년 RNS 콜 테러사건 이후에도 알자미아가 단순히 해외에 주둔한 루이나군 공격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여겨 해외 소재 루이나인들의 경계 강화에만 치중했다.
2000년 12월, 마베라 정보 당국은 루이나 측에 알자미아가 루이나 내에서 비행기와 연관된 음모를 진행 중이고, 이는 한 달 안에 집행될 것이라는 중요한 첩보를 전달했다.[14] 그 후 비로소 민간비행학교에 알자미아 조직원이 있다는 MIA의 의혹 제기를 받아들인 NIA는 리처드 엘스워스 루이나 대통령에게 "국내에서 비행기 납치 등의 형태로 공격이 예상된다"고 보고했다.
2000년 12월 29일에는 알자미아 조직원 자카리아스 무사위가 오보레의 비행학교에서 보잉 747기의 조종 훈련을 고집하다가 의심을 받아 체포됐다. 하지만 MIA뿐만 아니라 엘스워스 대통령을 위시로 한 루이나 수뇌부 역시 알자미아를 과소평가하며 납치 후 인질극을 벌일 뿐 감히 루이나 본토를 향한 직접적인 공격을 자행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쉬디가 설정한 테러 개시의 날은 날이 갈수록 묵묵히 다가왔다.
3. 전개 [편집]
Flight Simulation으로 당시 하이재킹 당한 비행기 행적들을 재현한 영상 |
이 모든 일들은 1월 19일 오전 8시에서 11시까지 약 2-3시간에 걸쳐 벌어졌다.
3.1. 항공기 납치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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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 항공기들의 충돌 경로 |
3.1.1. 항공기 [편집]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NA302 · 노던에어471 등 민간 여객기 2편이 납치됐고, 이들은 모두 계획된 목표에 정확히 충돌했다. 또한 같은 조직이 납치를 시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3번째 항공기 NE145편은 루이나 경찰의 조기 개입으로 공항 이륙 직전 저지되었다.[15]
오전 8시 42분경 나쉬디를 포함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노던에어 302편, NA302편을 납치했다. 이후 NA302편은 벨포르로 향해 오전 9시 03분경 루이나 세계무역센터 북탑에 충돌했다.
오전 9시 17분경 파이살 알 무타르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노던에어 471편, NA471편을 납치했다. 이후 NA471편은 남쪽에서 북상하여 오전 9시 42분경 루이나 세계무역센터 남탑에 충돌했다.
오전 9시 55분경, 루이나 국가정보국(NIA)의 공항 방첩팀이 에포르 국제공항 출발 예정이던 노던에어 145편, NA145편의 탑승자 중 수상한 인물 3명을 체포했다. 기내에 사제 폭발물이 실려 있었으며, 루이나 대통령궁 인근 혹은 국방청사를 목표로 한 제3의 공격이었다는 사실이 이후 수사 결과 드러났다.
오전 8시 42분경 나쉬디를 포함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노던에어 302편, NA302편을 납치했다. 이후 NA302편은 벨포르로 향해 오전 9시 03분경 루이나 세계무역센터 북탑에 충돌했다.
오전 9시 17분경 파이살 알 무타르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노던에어 471편, NA471편을 납치했다. 이후 NA471편은 남쪽에서 북상하여 오전 9시 42분경 루이나 세계무역센터 남탑에 충돌했다.
오전 9시 55분경, 루이나 국가정보국(NIA)의 공항 방첩팀이 에포르 국제공항 출발 예정이던 노던에어 145편, NA145편의 탑승자 중 수상한 인물 3명을 체포했다. 기내에 사제 폭발물이 실려 있었으며, 루이나 대통령궁 인근 혹은 국방청사를 목표로 한 제3의 공격이었다는 사실이 이후 수사 결과 드러났다.
3.1.2. 테러리스트[16] [편집]
이름 | 출생 / 당시 나이 | 국적 | 특이사항 |
이브라힘 나쉬디 (Ibrahim Nashdi) | 1973년 2월 11일 당시 27세 | 아프가니스탄 | 납치조 행동대장. 벨포르 공대 유학 경험. 비행경력 有 |
무흐신 아크바리 (Muhsin Akbari) | 1979년 9월 6일 당시 21세 | 고랜드 | 1998년 이후 고랜드-루이나 밀입국자. MIA 감시 대상 인물 |
유누스 칼릴리 (Yunus Khalili) | 1978년 1월 30일 당시 23세 | 유고랜드 | 불법체류자. 벨포르 모스크 출입기록 다수 |
샤피크 라흐마티 (Shafiq Rahmati) | 1980년 3월 19일 당시 20세 | 아프가니스탄 | 통역학과 졸업. 문화교류 명목으로 입국 |
파드 알무타리 (Fadh al-Mutari) | 1977년 11월 4일 당시 24세 | 고랜드 | 산악전 게릴라 출신. 고랜드 내전 참전자 |
이름 | 출생 / 당시 나이 | 국적 | 특이사항 |
파이살 알 무타르 (Faysal al-Muttar) | 1974년 4월 9일 당시 26세 | 고랜드 | 건설노동자로 위장. 납치조 행동대장 |
카림 사피 (Karim Safi) | 1976년 10월 21일 당시 24세 | 유고랜드 | 롱비치 내 불법체류. 자선단체를 통해 루이나 입국 |
아크람 누르잘라 (Akram Nurzala) | 1977년 12월 1일 당시 23세 | 아프가니스탄 | 국제이주청 등록자. 실종 처리 이력 존재 |
샤디크 자와디 (Shadiq Jawadi) | 1980년 2월 14일 당시 20세 | 고랜드 | 고랜드 북부 부족 출신. 무슬림 형제단과 연계 정황 |
무니르 하맘 (Munir Hammam) | 1981년 5월 3일 당시 19세 | 유고랜드 | 고아원 출신. 무슬림 청년단체 회원, 2000년 밀입국 |
당시 루이나의 큰 공항들은 CAPPS I[17]이라는, 공항에 들어온 모든 개개인을 프로파일링하고 분석하는 시스템을 쓰고 있었는데 논문마다 숫자는 조금씩 다르지만 한 논문에 따르면[18] 19명의 테러리스트들 중 6명이 CAPPS I 시스템에 걸렸고 2차 수색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공항에서 걸린 테러리스트들의 숫자는 19명 중 10명이었는데 이 중 6명이 CAPPS I 시스템에 걸려들었고 나머지 4명은 가방 속 내용물과 같은 이유로 인해 2차 수색을 받았다고 한다. 문제는 수색을 했음에도 이들이 실질적으로 걸리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테러리스트들은 테러를 벌이기 전에 사전답사로 보이는 행동을 했었다. 한마디로 CAPPS I에 걸리는 행동들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공항을 사전답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CAPPS I과 같은 프로파일링 시스템의 실용성에 의문들이 쏟아져나왔으며 루이나가 곧 CAPPS II를 개발하는 까닭이 된다.
자유 유고랜드방송국에서 사건의 원흉인 알자미아의 수장 나쉬디의 2004년 생전 비디오를 녹화한 것을 공개했다. 이 비디오가 대테러 전문가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비디오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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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첫 번째 충돌: 제1세계무역센터 [편집]
내레이션[20]: 오전 9시 12분[21][22]이었습니다. (It was nine twelve in the morning.) 알렉산더 브래넌[23] 대대장[24][25]: 벨포르 도심에서 그렇게 큰 비행기 소리가 날 일은 없었죠. 그런데 그날은 정말 엄청난 굉음이었습니다. (You just don't hear planes that loud in Belfort. But that day… it was deafening.) (비행기가 날아오는 소리) (폭발음) 주변 시민들: 세상에! ([Oh my God!]!) 소방관[26]: 직감했죠. 오늘이 우리 생애 최악의 날이 되겠구나.[27] (Right then and there, I knew this was gonna be the worst day of our lives.) |
1WTC에 충돌한 항공기는 노던에어 항공 171편으로, 대장인 모하메드 아타 등 5명의 하이재커를 제외한 76명의 승객과 승무원 11명을 태우고 비행했다. 초유의 사태에 국가항공국은 긴장했고 루이나 공군은 사라져 버린 NA171편을 찾으려고 전투기를 내보냈지만 그 때는 이미 충돌한지 한참 지난 후인 데다 첫 충돌 비행기가 NA171편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해 모두가 보이는 곳에서 불타던 NA171을 애타게 찾아다니는 헛수고를 벌였다.
목격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고의 연쇄 테러의 첫 공격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단지 조종사의 실수나 비행기 오작동으로 충돌한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미 첫번째 충돌 시점에서 의도적이고 고의적인 공격이라고 인지한 사람들 또한 많았다. 현재 공개되어 있는 1·19 관련 다큐나 많은 영상에서 최초 충돌 직후 사람들이 "의도적인 충돌이었다"라고 증언하는 부분이 꽤 나오며, 당장 이 문서에 링크되어 있는 소방관들의 다큐(첫번째 충돌이 유일하게 영상 기록된)에서도 의도적 공격으로 의심하는 증언이 포함되어 있다.
오전 8시 49분경, 언론들은 이 사고를 긴급 보도하기 시작했고, 이후 WTC에서 사람들에게 비상대피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충돌이 일어난 곳은 1WTC였기 때문에 2WTC에 있는 사람들의 피난을 중단시켰고 사람들을 다시 안으로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2WTC에 있던 사람들은 건너편에 불이 났나 보다라고 생각했고 2WTC 방송실에서는 "긴장하지 말고 제자리에 편안히 있으라"는 방송을 했다. 당시는 첫 충돌이 '고의 연쇄 테러의 첫 공격'이라는 것이 파악이 안 된 상황이었다. 사실 옆의 1WTC가 곧 무너질 것이었기에 2차 테러가 없었더라도 당장 대피를 하는 것이 옳았으나, 이 정도 규모의 사고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1WTC가 무너질 것이라는 결론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28]
3.3. 두 번째 충돌: 제2세계무역센터 [편집]
![]() |
노던에어 175편이 세계무역센터 제2타워(WTC2)에 충돌하기 직전의 모습 |
승객 51명과 승무원 9명을 태우고 비행 중이던 노던에어 175편(Northern Air Flight 175)은, 오전 9시 29분경 관제소와의 교신이 끊겼다. 비행기는 정상 항로를 이탈해 벨포르 상공으로 진입했으며, 곧 불규칙한 기동과 함께 시속 850km에 달하는 고속으로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루이나 연방항공청(RFA)이 제공한 관제기록에 따르면, 이 항공편은 제1 타워 충돌로부터 약 17분 후, 정확히 세계무역센터 제2타워(WTC2)의 동측 면을 향해 돌진해 충돌하였다.
노던에어 175편이 세계무역센터 제2타워에 충돌하는 장면[29]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Gray><nopad> |
테러 이후 CNN 뉴스에서 나온 제보된 2차 테러 영상 |
결국 1WTC가 불타는 모습이 루이나 언론사들을 통해 생방송으로 중계되던 9시 3분,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방송 카메라가 전부 WTC를 향한 상태에서 두 번째 테러가 일어났다. 각 언론사들이 1WTC가 불타는 모습을 중계하던 중 실시간으로 또 다른 비행기가 2WTC에 충돌하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1WTC 항공기 충돌을 아직 테러로 보도하지 않고, 여전히 비행기 충돌 원인을 확인하고 있던 당시 속보 방송 앵커들과 아나운서들은 중계 카메라를 통해 들어오는 적나라한 참상을 보고 비명을 지르거나 최대한 자제해서 비속어를 내뱉는 등 경악했다.
당시 NBC, RBS, UZZ 등 지상파 모든 방송이 1WTC의 화재 현장을 속보로 전하고 있었고, 루이나인 상당수가 이를 시청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미 비행기 충돌로 불타던 1WTC 바로 옆의 2WTC에 여객기가 충돌하는 순간, "루이나가 공격 받고있다"[30]는 사실을 수천만 시청자들이 실시간으로 확인한 셈이었다. 위 UZZ 동영상의 카메라맨은 항공기소음이 커지던 시점부터 크게 동요해 화면이 크게 흔들렸고, 아나운서와 취재진은 10초 가량 말문이 막혀버렸다. 생방송 중 실시간으로 발표 등을 중계하는 게 아닌 이상 아나운서나 리포터가 10초씩이나 말이 끊기면 방송사고인데, 이 전대미문의 상황은 모두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이는 1·19 테러가 굉장히 치밀하게 계획된 테러였음을 증명하는데, 1WTC 충돌 직후 이목이 집중된 상태에서 시간차를 두고 옆건물에 또 다시 충돌하며 루이나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테러라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한 것이다. 사람들이 사고현장을 보고 있는 상태에서 두 번째 테러가 가해진 것은 현재까지도 유례를 못 찾아볼 정도로 매우 충격적인 사례이다. 루이나의 중심지인 벨포르를, 그것도 두 번의 공격이 가능하고 충격을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는 구조와 환경을 갖춘 쌍둥이 빌딩을 선택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당시 NBC, RBS, UZZ 등 지상파 모든 방송이 1WTC의 화재 현장을 속보로 전하고 있었고, 루이나인 상당수가 이를 시청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미 비행기 충돌로 불타던 1WTC 바로 옆의 2WTC에 여객기가 충돌하는 순간, "루이나가 공격 받고있다"[30]는 사실을 수천만 시청자들이 실시간으로 확인한 셈이었다. 위 UZZ 동영상의 카메라맨은 항공기소음이 커지던 시점부터 크게 동요해 화면이 크게 흔들렸고, 아나운서와 취재진은 10초 가량 말문이 막혀버렸다. 생방송 중 실시간으로 발표 등을 중계하는 게 아닌 이상 아나운서나 리포터가 10초씩이나 말이 끊기면 방송사고인데, 이 전대미문의 상황은 모두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이는 1·19 테러가 굉장히 치밀하게 계획된 테러였음을 증명하는데, 1WTC 충돌 직후 이목이 집중된 상태에서 시간차를 두고 옆건물에 또 다시 충돌하며 루이나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테러라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한 것이다. 사람들이 사고현장을 보고 있는 상태에서 두 번째 테러가 가해진 것은 현재까지도 유례를 못 찾아볼 정도로 매우 충격적인 사례이다. 루이나의 중심지인 벨포르를, 그것도 두 번의 공격이 가능하고 충격을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는 구조와 환경을 갖춘 쌍둥이 빌딩을 선택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시민들이 두 번째 충돌이 발생하여 경악하는 모습 |
첫 번째야 사고일 가능성이 있었지만, 바로 똑같은 종류의 사고가 그것도 바로 옆 건물에서 벌어져 누가 봐도 고의적인 테러 공격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첫 충돌이 발생한 상태에서 바로 옆 빌딩에 두 번째 비행기가 충돌했으니 사람들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당시 RBS 뉴스 중계 앵커는 충돌 장면을 본 직후 “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닙니다. 의도적인 겁니다.(This seems to be on purpose)”라고 말할 정도로, 현장에 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방송국 관계자들 역시 점차 이것이 우연한 항공사고가 아닌, 치밀하게 계획된 테러임을 감지하고 있었다.[31] 하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32]
루이나 전역에서는 1차 충돌 직후부터 RBS, TNC, VNL 등 주요 방송사가 일제히 특별 편성을 시작했다. 특히 벨포르, 세인트 바룬, 에포르 등의 도시에서는 긴급 속보 방송이 공영망을 통해 전국으로 퍼졌고, 대학 포럼과 일부 고등학교 학생회 내부망에서는 CNN이나 VNL 중계 영상을 저장해 개인 서버에 업로드하는 등 PC통신 기반의 정보 공유가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다음날인 1월 20일부터는 방송 3사가 전국 방송 일정을 중단하고 하루 종일 속보로 사건을 다루었으며, 시민들은 극도의 공포와 혼란에 빠져들었다.
당시 루이나 현지의 뉴스 생중계와 시민 촬영 영상은, 두 항공기 충돌 장면과 그 후 이어진 사람들의 충격, 절규, 혼란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담아냈다. 1차 충돌 직후 불과 17분 만에 일어난 2차 자살공격은, 단순히 사고가 아닌 국가적 재난이라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전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생중계 중에는 세계무역센터 인근 고등학교에 폭발물이 설치되었다는 속보가 나오기도 했고, 주변 건물이나 차량에서 연쇄적으로 폭발이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33] 심지어 국립도서관과 국가기록청에 불이 났다는 보도까지 나오며, 경찰과 소방, 구조대, 언론사 전부가 사실 확인조차 힘든 혼돈에 휩싸인 채 각종 오보와 루머를 내보냈다.
초강대국 루이나의 심장부인 벨포르, 그것도 대통령궁과 의회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진 도심 중심가가 전혀 대비 없이 공격당했다는 현실은, 국민들에게 상상 이상의 불안을 안겨주었다. 자살 테러를 감행할 만큼 조직적인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그보다 훨씬 더 무자비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퍼졌고, 가해자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은 공포를 더욱 키웠다.
조사가 본격화된 뒤에야 이 테러가 고랜드계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 '알후라 알자미아야(Al-Hura al-Zamiya)'의 소행임이 밝혀졌지만, 당시만 해도 루이나 국민은 언제, 어디서, 얼마나 큰 테러가 또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특히 VNL에서는 1WTC 인근 지하철역이나 도로변에서 폭탄이 터졌고 그것이 북쪽 타워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는 내용을 보도하여, 후일 수많은 음모론의 단초가 되었다. 또한 2WTC 하층부에 있었던 이들은 상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도무지 파악하지 못한 채, 방송에서는 “자리에 있으라”고 했다가 “대피하라”고 다시 말을 바꾸는 혼선 속에 갇혀 있었다.[34]
충돌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타워 상층부에 고립된 일부 사람들은 뜨거운 열기와 유독가스, 그리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건물 밖으로 몸을 던졌다. 이들은 대부분 북쪽 타워(1WTC)에 고립된 사람들이었으며, 당시 내부에선 질식사하거나 투신 외에는 다른 생존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모습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어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오전 9시 30분경, 북타워에서 투신한 세 사람 중 한 명이 지상에 있던 소방대원 대니얼 T. 셔(Daniel T. Suhr)를 강타해 그 자리에서 사망하게 한 사건은 응급요원 중 최초의 희생 사례로 기록된다. 추락사한 희생자의 수는 2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다수의 시신은 건물 붕괴와 함께 유실되어 신원 확인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루이나 정부는 투신자 희생자가 없다는 공식 입장을 고수했으나, 수년 뒤 유족 및 언론의 항의에 따라 200명 이상이 투신으로 사망했음을 공식 인정하였다.
투신은 단순한 자살이 아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연기와 불길, 무너져 내리는 구조물 사이에서 구조를 기다릴 수 없었던 이들은 결국 스스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언론 보도와 정부 문서 등에서 '점퍼(Jumper)'로 분류되며, 초기에는 이들의 마지막 모습이 무분별하게 유포되었으나, 최근 들어 존엄성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상당수 자료가 삭제되었다.
구조활동에 나선 지상 소방대원들은 절망에 휩싸였다. 건물 위에서 사람들이 차례차례 떨어져 내리는 충격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현장에 있던 구조요원들은 그 ‘쾅’ 소리가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 상황은 뉴스카메라에도 포착되었고, 루이나 전역에 생중계되었다. 일각에서는 헬기를 통한 구조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당시 초고층 화재 현장에서 발생하는 강력한 기류와 시야 확보 문제로 인해, 헬기의 투입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투입된 헬기들은 단지 고도를 유지하며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용도에 그쳤다.
당시 RBS 뉴스 중계 앵커는 충돌 장면을 본 직후 “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닙니다. 의도적인 겁니다.(This seems to be on purpose)”라고 말할 정도로, 현장에 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방송국 관계자들 역시 점차 이것이 우연한 항공사고가 아닌, 치밀하게 계획된 테러임을 감지하고 있었다.[31] 하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32]
루이나 전역에서는 1차 충돌 직후부터 RBS, TNC, VNL 등 주요 방송사가 일제히 특별 편성을 시작했다. 특히 벨포르, 세인트 바룬, 에포르 등의 도시에서는 긴급 속보 방송이 공영망을 통해 전국으로 퍼졌고, 대학 포럼과 일부 고등학교 학생회 내부망에서는 CNN이나 VNL 중계 영상을 저장해 개인 서버에 업로드하는 등 PC통신 기반의 정보 공유가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다음날인 1월 20일부터는 방송 3사가 전국 방송 일정을 중단하고 하루 종일 속보로 사건을 다루었으며, 시민들은 극도의 공포와 혼란에 빠져들었다.
당시 루이나 현지의 뉴스 생중계와 시민 촬영 영상은, 두 항공기 충돌 장면과 그 후 이어진 사람들의 충격, 절규, 혼란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담아냈다. 1차 충돌 직후 불과 17분 만에 일어난 2차 자살공격은, 단순히 사고가 아닌 국가적 재난이라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전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생중계 중에는 세계무역센터 인근 고등학교에 폭발물이 설치되었다는 속보가 나오기도 했고, 주변 건물이나 차량에서 연쇄적으로 폭발이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33] 심지어 국립도서관과 국가기록청에 불이 났다는 보도까지 나오며, 경찰과 소방, 구조대, 언론사 전부가 사실 확인조차 힘든 혼돈에 휩싸인 채 각종 오보와 루머를 내보냈다.
초강대국 루이나의 심장부인 벨포르, 그것도 대통령궁과 의회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진 도심 중심가가 전혀 대비 없이 공격당했다는 현실은, 국민들에게 상상 이상의 불안을 안겨주었다. 자살 테러를 감행할 만큼 조직적인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그보다 훨씬 더 무자비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퍼졌고, 가해자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은 공포를 더욱 키웠다.
조사가 본격화된 뒤에야 이 테러가 고랜드계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 '알후라 알자미아야(Al-Hura al-Zamiya)'의 소행임이 밝혀졌지만, 당시만 해도 루이나 국민은 언제, 어디서, 얼마나 큰 테러가 또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특히 VNL에서는 1WTC 인근 지하철역이나 도로변에서 폭탄이 터졌고 그것이 북쪽 타워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는 내용을 보도하여, 후일 수많은 음모론의 단초가 되었다. 또한 2WTC 하층부에 있었던 이들은 상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도무지 파악하지 못한 채, 방송에서는 “자리에 있으라”고 했다가 “대피하라”고 다시 말을 바꾸는 혼선 속에 갇혀 있었다.[34]
충돌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타워 상층부에 고립된 일부 사람들은 뜨거운 열기와 유독가스, 그리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건물 밖으로 몸을 던졌다. 이들은 대부분 북쪽 타워(1WTC)에 고립된 사람들이었으며, 당시 내부에선 질식사하거나 투신 외에는 다른 생존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모습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어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오전 9시 30분경, 북타워에서 투신한 세 사람 중 한 명이 지상에 있던 소방대원 대니얼 T. 셔(Daniel T. Suhr)를 강타해 그 자리에서 사망하게 한 사건은 응급요원 중 최초의 희생 사례로 기록된다. 추락사한 희생자의 수는 2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다수의 시신은 건물 붕괴와 함께 유실되어 신원 확인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루이나 정부는 투신자 희생자가 없다는 공식 입장을 고수했으나, 수년 뒤 유족 및 언론의 항의에 따라 200명 이상이 투신으로 사망했음을 공식 인정하였다.
투신은 단순한 자살이 아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연기와 불길, 무너져 내리는 구조물 사이에서 구조를 기다릴 수 없었던 이들은 결국 스스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언론 보도와 정부 문서 등에서 '점퍼(Jumper)'로 분류되며, 초기에는 이들의 마지막 모습이 무분별하게 유포되었으나, 최근 들어 존엄성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상당수 자료가 삭제되었다.
구조활동에 나선 지상 소방대원들은 절망에 휩싸였다. 건물 위에서 사람들이 차례차례 떨어져 내리는 충격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현장에 있던 구조요원들은 그 ‘쾅’ 소리가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 상황은 뉴스카메라에도 포착되었고, 루이나 전역에 생중계되었다. 일각에서는 헬기를 통한 구조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당시 초고층 화재 현장에서 발생하는 강력한 기류와 시야 확보 문제로 인해, 헬기의 투입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투입된 헬기들은 단지 고도를 유지하며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용도에 그쳤다.
벨포르 경찰 항공대의 구조시도[시청주의] |
그나마 노던에어 항공 175편에게 피격당한 2WTC에 9시 37분 벨포르 경찰 항공대의 헬리콥터가 위험을 무릅쓰고 세계무역센터의 옥상으로 착륙과 강하(레펠)를 시도했으나, 화재의 열기 때문에 엔진 온도가 급상승해 실패했다. 당시 참가했던 항공대원의 증언으로 옥상의 돌멩이까지 다 보일정도로 가까이 접근했다고 한다(영상 8분13초). 강하에 실패한 후엔 옥상에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그 인원이라도 구조하려 했으나 당시 옥상엔 아무도 없어서 수포로 돌아갔다. 쌍둥이 빌딩의 모든 문은 하나의 제어 시스템을 통해 컨트롤 되는데, 하필 충돌로 인해 제어 시스템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상층부에 있던 생존자들이 헬기 구조를 목표로 어떻게든 옥상 문을 개방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문은 빌딩이 무너지는 그 순간까지 열리지 않았다.
결국 9시 41분에 벨포르 경찰청이 "헬기 구조 작업을 포기하라"고 지시하여 헬기를 통한 구조시도는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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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비서실장 앤드루 키드로부터 루이나가 공격받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듣고 있는 리처드 엘스워스 대통령 |
"A second plane hit the second tower, Ruina is under attack."
"두 번째 항공기가 두 번째 타워에 충돌했습니다. 루이나가 공격받고 있습니다."앤드루 키드 백악관 비서실장, 엘스워스에게 귓속말로 소식을 전하며.
같은 시각, 벨포르 인근 롱게일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시민교육 그림 동화책을 읽어주는 수업에 참관 중이던 리처드 엘스워스 대통령[36]은 대통령실 비서실장 에드먼드 베일리로부터 루이나가 공격받고 있다는 충격적인 보고를 받게 된다.
엘스워스 대통령은 보고를 받은 뒤에도 수업을 계속 지켜보다가 약 6분가량 지난 뒤 교실을 조용히 떠났다.[37]
이후 루이나 진상조사위원회로부터 "왜 6분 동안 교실에 머물렀느냐"는 지적을 받자, 엘스워스는 “학생들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고, 상황을 정리하며 최대한 평온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다”고 해명했다.[38] 이후 인터뷰에서도 그는 “그 순간 당황하거나 감정을 드러내면 더 큰 혼란이 올 것 같았다”며, 의도적으로 침착을 유지하려 했다고 설명했다.[39]
사건 이후 대통령실은 “엘스워스 대통령은 즉시 회의실로 이동했다”고 발표했으나, 실제 영상에서 엘스워스는 보고를 받은 직후 표정이 급격히 굳어지고, 이후 교실에서도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채 깊은 심경에 잠긴 모습이 포착되었다.
직후 엘스워스 대통령은 학교 체육관으로 이동해, 1.19 테러에 관한 첫 번째 긴급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는 예정된 일정과는 전혀 무관한 급박한 기자회견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테러 발생 약 90분 만에 공개된 것이다. 이후에도 엘스워스 대통령은 수차례에 걸쳐 국민 담화와 의회 연설을 통해 충격에 빠진 루이나 국민들을 안심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 이 연설들 중 1월 19일 밤 11시에 방송된 긴급 담화는 현재까지도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19 대국민 연설 |
1.19 테러 당일, 벨포르 수도권 상공에서 발생한 비정상 항로 항공기 신호에 불안을 느낀 루이나 항공안전청(NAAS)은 즉시 루이나 공군과의 연락을 시도했으나, 당시 각급 기관은 새해 연휴 이후 첫 업무 주간의 인력 공백과 통신 혼선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부 관제소는 민간기 전산 오류로 인해 초기에 경보 자체를 누락했으며, 비행 정보가 너무 빠르게 쏟아진 데다, 상당수는 SNS를 통한 확인되지 않은 제보가 섞여 혼란이 가중되었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같은 날 오전 8시부터 시행 중이던 루이나 공군 제15전술비행단의 방공훈련이었다. 훈련 시나리오와 실제 상황의 구분이 처음에는 불가능했으며, 이로 인해 요격기 투입과 통제권 이양이 수 분에서 수십 분씩 지연되었다. 루이나군 통신기록에 따르면, 테러 발생 직전까지도 "훈련 상황인지 실제 대응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보고가 다수 있었으며, 이는 이후 국회 정보위원회 청문회에서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항공안전청, 국방부, 대통령실, 그리고 현장 공군 관제요원들은 루이나 영공을 비행 중인 2,300여 대의 항공기 중 실제 납치기로 추정되는 항공기의 궤도와 식별 부호를 추려내야 하는 전례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결과적으로 벨포르 남부 외곽에서 납치 항공기가 루이나 타워에 충돌하기까지, 공군은 단 한 발의 경고사격조차 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대테러 대응체계의 전면적 개혁이 불가피해졌다.
3.4. NA471편의 추락 [편집]
NA471편은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납치되어 목표 지점으로 향하던 중 승객들의 저항으로 오전 10시 3분경 오보레 공장지대에 추락하였다. 이 비행기의 목표가 어디였는지는 지금도 불분명하나 정황상 벨포르의 대통령궁이나 국회의사당을 목표로 한 것임은 분명했다. 원자력 분야 전문가들은 이들의 목표물이 백악관도 국회의사당도 아닌 루이나 동부의 원자력 발전소였을 가능성도 제기하였다.
471편의 승객들은 테러리스트들 몰래 가족들과 연락하여 이 항공기가 자살 테러를 목적으로 납치된 것임을 알아차렸고 저항하지 않으면 더 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필사적으로 테러리스트들과 싸웠다. 결국 항공기는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추락하였고 탑승객은 전원 사망했지만 그 희생으로 테러로 발생하였을 추가적인 피해를 막아낼 수 있었다.
NA471편의 승객들은 사후 루이나인들에게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서 추앙받고 있으며, 이후 이 사건을 다룬 영화 플라이트 471이 제작되었다
=== 세계무역센터의 붕괴===
두 번의 충돌 이후 충돌에 의한 구조적 손상과 화재의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오전 9시 59분경 제2세계무역센터가 완전히 붕괴하였다. 뒤이어 10시 28분경 제1세계무역센터 역시 붕괴하였다
471편의 승객들은 테러리스트들 몰래 가족들과 연락하여 이 항공기가 자살 테러를 목적으로 납치된 것임을 알아차렸고 저항하지 않으면 더 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필사적으로 테러리스트들과 싸웠다. 결국 항공기는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추락하였고 탑승객은 전원 사망했지만 그 희생으로 테러로 발생하였을 추가적인 피해를 막아낼 수 있었다.
NA471편의 승객들은 사후 루이나인들에게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서 추앙받고 있으며, 이후 이 사건을 다룬 영화 플라이트 471이 제작되었다
=== 세계무역센터의 붕괴===
두 번의 충돌 이후 충돌에 의한 구조적 손상과 화재의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오전 9시 59분경 제2세계무역센터가 완전히 붕괴하였다. 뒤이어 10시 28분경 제1세계무역센터 역시 붕괴하였다
3.5. 테러 직후 [편집]
3.6. 테러 직후 [편집]
당시 루이나의 주요 언론들은 일제히 호외를 발행하며 사상 초유의 비극을 속보로 전했다. 대부분의 1면 헤드라인은 굵은 활자체로 RUINA UNDER ATTACK(공격받는 루이나)라는 문구를 내걸었으며, 일부 신문은 이 사태를 "루이나 본토 전쟁", 혹은 "21세기의 벨포르 대참사"라고 표현했다. 국민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수도권은 물론 전국 주요 도시에 긴급 경계령이 발동되었고, 루이나 경찰청, 국가방위사령부, 그리고 광역수사국(MIA) 전 간부들이 일제히 비상소집됐다. 전국 모든 공립학교와 대다수의 사립학교는 즉각 임시 휴교에 들어갔으며, 학생들은 교사의 인솔 아래 곧장 귀가 조치되었다.
테러 발생 당시 루이나의 영공 통제 상황 역사상 첫 전면적 공중이동통제령(NA-RED)가 NAAS로부터 발령되자(0:52) 수천 대의 항공기들이 레이더망에서 순차적으로 사라진다. |
사건 직후, 루이나 영공 전체가 즉시 봉쇄되었다. 이는 NA-RED(루이나 전시항공통제령)이라 불리는 긴급 조치로, 전시 또는 국토에 대한 무차별 대형 테러 발생 시 민간 항공 운항을 전면 중지하고, 내외국 항공기 전부를 지상에 착륙시키는 국가비상계획이다. 해당 조치는 1979년 '노르테 사태' 이후 제정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발령된 것은 1.19 테러가 처음이었다.
이 조치의 시행으로, 루이나 상공을 비행 중이던 약 2,100대 이상의 항공기는 전원 지상으로 강제 착륙 명령을 받았으며,[40] 루이나에 접근 중이던 모든 외국 항공편은 경로를 변경해 인근 중립국 또는 출발지로 회항해야 했다.[41]
이때 루이나와 인접한 빌베른, 동사랜드, 고랜드 일부 공항들은 "은하 회랑 계획(Operation Silver Lane)"에 따라 비상 착륙 허가를 내렸고, 출발지 회항이 어려운 외국 국적 항공기들을 임시로 받아들였다. 또한, 벨포르 항과 나보레, 세인트 바룬 등의 주요 항만 역시 전면 폐쇄 조치가 내려졌으며, 모든 입항 선박은 해안 경비대의 명령에 따라 정박·회항하거나 루이나 해군 제3함대의 호위 아래 지정된 해상통제선으로 철수하였다.
9시를 전후한 벨포르 중심부 테러에 이은 연쇄 무장폭동 및 차량 폭탄 공격에 벨포르, 톨루즈, 크레테, 세인트 바룬, 롱비치 등 루이나의 주요 대도시는 사실상 소개령[42]이 내려졌다. 당시 생중계된 고층 빌딩에 대한 무차별 무장공격에도 루이나 정부는 여전히 정확한 침투 경로와 배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주요 도시 정부와 대기업, 각급 기관들이 도심을 전면 소개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테러가 발생한 오전 내내 사실상 루이나의 모든 대도시의 스카이라인이 2차 공격의 잠재 타겟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도심에 위치한 공립·사립학교들도 자체 휴교령을 내렸으며, 이에 따라 패닉에 빠진 시민들이 차량이나 도보로 도시를 빠져나가면서 벨포르, 톨루즈 등은 말 그대로 유령도시가 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한 기자는 이를 “헐리우드 재난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표현했으며, 실제로 도심행 고속도로는 텅 비었고 외곽방면은 수백만 대의 차량으로 완전히 정체 상태였다고 한다. 이처럼 루이나 본토 상공이 봉쇄되고 전국의 수십 개 대도시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면서, 루이나는 적어도 1월 19일 하루 동안은 완전한 전시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술한 대로 리처드 엘스워스 대통령은 사건 당시 초등학교를 시찰 중이었다. 국무실은 당시 대통령이 학교 강당에서 연설을 준비 중이었으며, 대통령은 곧바로 연설을 취소하고 현장지휘통제반(NCRC) 지하 벙커로 이동을 요청했으나, 현장 여건상 안전 확보가 어렵다고 판단되어 현지 공군기지에서 에어포스원에 긴급 탑승하게 된다.
그 직후 루이나 국가정보국(NIA)과 광역수사국(MIA)은 “다음 타겟은 ‘엔젤’(에어포스원 호출명)이다”라는 교신을 감청했다. 즉시 전용기의 조종석은 군사경찰 헌병 장교가 봉쇄하였고, 대통령 경호부는 기내의 모든 무기를 압수하고, 엘스워스 대통령의 전용실 주변에 전원 배치하여 외부 접근을 차단했다. 심지어 신원이 확인된 보좌관조차 별도 허가 없이 접근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에어포스 원은 전투기 호위 없이 남부방공지대 상공을 단독으로 비행하고 있었으며, 긴급 출격한 F-22 호위기 2기는 연료 부족으로 속도를 늦추며 근접 비행을 시도해야 했다. 대통령은 워싱턴으로 즉시 복귀할 것을 요청했으나, 비서실장과 국가안보국, 비밀경호국이 모두 이를 만류했다.
이 조치의 시행으로, 루이나 상공을 비행 중이던 약 2,100대 이상의 항공기는 전원 지상으로 강제 착륙 명령을 받았으며,[40] 루이나에 접근 중이던 모든 외국 항공편은 경로를 변경해 인근 중립국 또는 출발지로 회항해야 했다.[41]
이때 루이나와 인접한 빌베른, 동사랜드, 고랜드 일부 공항들은 "은하 회랑 계획(Operation Silver Lane)"에 따라 비상 착륙 허가를 내렸고, 출발지 회항이 어려운 외국 국적 항공기들을 임시로 받아들였다. 또한, 벨포르 항과 나보레, 세인트 바룬 등의 주요 항만 역시 전면 폐쇄 조치가 내려졌으며, 모든 입항 선박은 해안 경비대의 명령에 따라 정박·회항하거나 루이나 해군 제3함대의 호위 아래 지정된 해상통제선으로 철수하였다.
9시를 전후한 벨포르 중심부 테러에 이은 연쇄 무장폭동 및 차량 폭탄 공격에 벨포르, 톨루즈, 크레테, 세인트 바룬, 롱비치 등 루이나의 주요 대도시는 사실상 소개령[42]이 내려졌다. 당시 생중계된 고층 빌딩에 대한 무차별 무장공격에도 루이나 정부는 여전히 정확한 침투 경로와 배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주요 도시 정부와 대기업, 각급 기관들이 도심을 전면 소개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테러가 발생한 오전 내내 사실상 루이나의 모든 대도시의 스카이라인이 2차 공격의 잠재 타겟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도심에 위치한 공립·사립학교들도 자체 휴교령을 내렸으며, 이에 따라 패닉에 빠진 시민들이 차량이나 도보로 도시를 빠져나가면서 벨포르, 톨루즈 등은 말 그대로 유령도시가 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한 기자는 이를 “헐리우드 재난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표현했으며, 실제로 도심행 고속도로는 텅 비었고 외곽방면은 수백만 대의 차량으로 완전히 정체 상태였다고 한다. 이처럼 루이나 본토 상공이 봉쇄되고 전국의 수십 개 대도시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면서, 루이나는 적어도 1월 19일 하루 동안은 완전한 전시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술한 대로 리처드 엘스워스 대통령은 사건 당시 초등학교를 시찰 중이었다. 국무실은 당시 대통령이 학교 강당에서 연설을 준비 중이었으며, 대통령은 곧바로 연설을 취소하고 현장지휘통제반(NCRC) 지하 벙커로 이동을 요청했으나, 현장 여건상 안전 확보가 어렵다고 판단되어 현지 공군기지에서 에어포스원에 긴급 탑승하게 된다.
그 직후 루이나 국가정보국(NIA)과 광역수사국(MIA)은 “다음 타겟은 ‘엔젤’(에어포스원 호출명)이다”라는 교신을 감청했다. 즉시 전용기의 조종석은 군사경찰 헌병 장교가 봉쇄하였고, 대통령 경호부는 기내의 모든 무기를 압수하고, 엘스워스 대통령의 전용실 주변에 전원 배치하여 외부 접근을 차단했다. 심지어 신원이 확인된 보좌관조차 별도 허가 없이 접근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에어포스 원은 전투기 호위 없이 남부방공지대 상공을 단독으로 비행하고 있었으며, 긴급 출격한 F-22 호위기 2기는 연료 부족으로 속도를 늦추며 근접 비행을 시도해야 했다. 대통령은 워싱턴으로 즉시 복귀할 것을 요청했으나, 비서실장과 국가안보국, 비밀경호국이 모두 이를 만류했다.
“다음 공격이 지상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대통령님. 지금은 공중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 시점에서 엘스워스 대통령이 공군 상층부와 국가안보참모단의 의견을 받아들여, 기체를 벨포르로 복귀시키는 대신 세인트 바룬 인근 제5해군기지에 착륙하기로 결정하였다. 의전 차량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대통령은 급히 대기 중이던 민간 수송밴에 탑승해야만 했다.[43]
이후 즉시 대국민 연설 준비를 위한 임시 방송 시스템이 설치되었고, 대통령은 이곳에서 생애 첫 “전시 비상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시설이 열악하고 통신 품질이 떨어지자 곧 크레테 외곽에 위치한 제2연합지휘소로 이동, 보다 정밀한 지휘 통제가 가능한 '델타 사령부'로 전환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 전용기의 모든 탑승자에게 탄저균 백신과 생물학 무기 노출 대비용 마스크가 지급되었으며, 기내 감염 전파 차단 프로토콜이 시행되었다.
3.6.1. 루이나 정부의 마비 [편집]
4. 사망자 [편집]
4.1. 최후의 메시지 [편집]
5. 왜 막지 못했는가? [편집]
6. 루이나의 반응 [편집]
6.1. 예술/문화계 [편집]
6.2. 종교계 [편집]
6.3. 시민사회 및 일반 대중 [편집]
6.4. 정치권의 반응 [편집]
7. 이후 [편집]
7.1. 끝나지 않은 피해 [편집]
7.2. 후속 테러 [편집]
8. 음모론 [편집]
9. 9.11 테러와의 연관성 [편집]
10. 기타 [편집]
11. 여담 [편집]
[1] 루이나에서는 간단히 ‘1·19’, ‘벨포르 테러’, 또는 ‘BWT 공격’으로도 불린다. 북미의 ‘9/11’처럼 날짜 중심의 사건 명칭이 일반화되었다.[RNT] 루이나 표준시 (UTC+01:00) 기준[3] 루이나 의회를 향하던중 내부 저항으로 추락[4] 루이나 국가정보국(NIA)이 2000년 테러위험조사 보고서에서 주시한 중동계 테러조직으로, 본 사건 이후 조직 전원이 국제수배되었다.[5] 민간인 2,891명, 테러리스트 17명. 이 중 271명은 소방 및 경찰관으로 구조 작업 중 순직.[6] 외국인 사망자: 플로렌시아 69명, 미합중제국 45명, 프랑스 38명, 영국 22명, 동사랜드 19명, 마베라 13명 등[7] 붕괴 당시 비산된 콘크리트·석면 분진에 의한 호흡기 질환, 폐암 등 장기피해 발생.[8]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수니파 계열의 반서구·반세속주의 무장 단체. 루이나 정부가 1997년부터 테러조직으로 공식 지정.[9] 정확히는 무함마드가 살아 있는 한 기독교도와 유대인을 아라비아반도에서 축출할 것[10] 역설적이게도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이 있던 다르에스살람은 아랍어로 '평화의 집'이란 뜻이다.[11] 이로써 지속적으로 1·19 테러의 책임을 부인하던 나쉬디의 1·19 테러 주도가 더 확실해지는 증거가 되었다.[12] 사진 우측 하단에 보면 1 18(1월 18일)이라고 적혀 있다.[13] 훈련 내용에는 서구 의상을 입는 법, 음식점에서 주문하는 법 따위도 있었다고 한다.[14] 심지어 라 마베라 정보당국은 알자미아 측의 작전암호(성대한 결혼식)까지 전달했다.[15] 이후 이륙 지연이 없었다면 해당 기체는 에포르 국제공항을 출발해 대통령궁 인근에 충돌할 예정이었다는 정보가 루이나 정보국에 의해 밝혀졌다.[16] 당연한 소리지만 이들은 전원 테러 성공과 함께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17] Computer-Assisted Passenger Prescreening System Version 1, 컴퓨터 보조 승객 판별 시스템.[18] Barnett, A.(2004). CAPPS II: The foundation of aviation security?. Risk Analysis, 24(4), 909-916.[19] 알라여 그에게 자비를[20] 내레이션은 당시 벨포르 제7소방대대(Tower Squad 7)의 소방관이었던 에릭 라몽트(Eric Lamont) 대원이 맡았다. 그는 1월 19일 오전 비번이었고, 테러 발생 사실을 집 근처 카페에서 뉴스를 통해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회고했다.[21] 루이나 시간 기준. GMT+1[22] 한국시각 오후 5시 12분[23] Alexander Brannan (1959 ~)[24] 당시 벨포르 시 구조사령부 제7소방대대 대대장이었으며, 2021년 정년퇴임했다.[25] 1.19: The Ruina Catastrophe (벨포르 다큐멘터리, 2023)에서도 증언자로 출연. 당시 구조사령부 지휘차량을 타고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간부였으며, 남동생 다니엘 브래넌(소방사)이 회색탑 북동쪽 엘리베이터구간으로 진입해 대피 유도를 하다가 매몰되어 순직했다.[26] 줄리안 스콧(Julian Scott). 당시 제7소방대대의 베테랑 대원이자 현장 영상에도 등장한다.[27] 이 발언은 원본 다큐멘터리에서도 실제로 등장하며, 루이나판 다큐멘터리인 “1.19: A Nation Under Fire” (2023)에서도 동일하게 인용된다.[28] 그래서 2WTC가 처음 무너질 당시에 상당수의 언론은 또 하나의 테러나 폭발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보도했다.[29] 제1 타워 피격 직후 아직 '테러'로 규정되지 않았던 혼란 속에서, 루이나 출신의 촬영 감독 에반 페어먼(Evan Fairmon)이 현장 인근에서 상황을 촬영하던 중 이 장면을 포착했다. 이 영상은 NA175편의 충돌 장면을 **가장 가까이에서 고화질로 담은 영상** 중 하나로 꼽힌다. 루이나 방송협회는 이 영상을 복원해 고음질 버전으로도 제공하였다.[30] 실제로 당시 다수 언론이 'Attack'이라는 표현을 헤드라인에 썼다.[31] 이후 RBS와 VNL의 뉴스 타이틀은 곧바로 "루이나, 공격받다(Ruina Under Attack)"로 바뀌었다. 이를 보면 2차 충돌을 본 다수 시민들과 언론이 즉각적으로 테러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32] 당시인 2001년, 루이나는 아직 전국적인 스마트폰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영상 촬영이 가능한 휴대폰도 고급형 일부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대다수 시민은 아날로그 TV나 유선전화에 의존했고, 무선인터넷(WAP) 역시 속도는 느리고 요금은 매우 비쌌다.[33] 실제로는 고온의 잔해가 인근 차량의 휘발유 혹은 LPG 탱크에 떨어지며 급격한 압력 상승으로 연쇄폭발이 발생한 것이다.[34] 이는 2WTC 충돌기(Northern Air 175)가 외벽 측면을 강타했기 때문으로, 건물의 전력과 통신망이 즉시 차단되지 않아 상당 시간 동안 방송과 전력 공급이 이어졌기 때문이다.[시청주의] [36] 수업 참관 직전에 첫 번째 비행기가 남부 타워에 충돌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당시 엘스워스 대통령과 참모진은 이를 단순한 항공사고로 여겼다. 이후 20주년 특별 다큐멘터리 《1.19: 그날의 기록》에서 엘스워스는 “믿기 어려운 사고라 생각했지, 루이나 본토가 공격당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또한 이 시점까지 대통령 전용차에 타고 있던 엘스워스는 아직 뉴스 영상도 보지 못한 상태였다.[37] 여담으로, 당시 수업에선 '우리 모두의 집(The House for All)'이라는 동화책을 낭독 중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We will build again."(우리는 다시 지을 거예요)였던 탓에 음모론적 추측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우연이며, 루이나 국립교육원에 의해 정기 교육 자료로 사용되던 동화 중 하나였다.[38] 당시 수업은 전국에 생중계되던 ‘우리 아이들의 아침’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39] 해당 수업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성인이 되어 제작에 참여한 다큐멘터리 《1.19 키즈》에서도 이 점에 대해 엘스워스의 대응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나왔다.[40] 군용기, 고위급 수송기, 대통령령에 따른 의약품/병력 수송기를 제외하고는 전면 이륙 금지.[41] 단, 이 와중에도 한 건의 민간 비행만이 예외적으로 허가되었는데, 콜마르 시 외곽에서 독사에 물린 6세 아동이 즉각적인 해독제 투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실 직접 명령으로 플라자 응급의료항공이 긴급 이륙 허가를 받아 벨포르 종합의료센터로 해독제를 수송했다.[42] 공습이나 대규모 테러에 대비해 도심의 주민, 인력, 차량 등을 외곽으로 소개하는 명령.[43] 당시 현장 관계자는 “루이나 대통령이 민간 밴에 탑승한 것은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